0.
'누구누구 씨, 이거 언제까지 해 놔요'
'누구누구 씨, 이거 뚝딱뚝딱해서 언제까지 뫄뫄씨 한테 보내요'
'누구누구야, 이런 게 있는 데 한 번 해볼래?'

'누구누구야, 소개팅할래?'

동료로부터 업무 협조요청을 받거나, 아니면 괜찮은 교육 혹은 소개팅을 제안 받으면 일단 입으로는 대답을 한다.
그렇지만 그 대답이 끝나기 무섭게 이런 생각이 든다.

'어떻게 하는거지? 난 아직 감도 안 잡히는데?'
'난 아직 이걸 할 준비가 안되어 있는 (거 같은)데?'

이처럼.. 나는 무언가가 나에게 부과되기 전에 잘 준비되어 있어야 한다는 마음이 놓이는(?) 습성이 있다.
잘 준비되지 않은 상황에서 섣불리 무언가를 받아들였다가 좋지 않은 결과를 내거나 실수를 해 난감한 상황에 놓이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제도권 교육을 충실히 겪으며 살아온 덕분에 이런 습성이 생긴 것일지도 모르겠다.
(대한민국 교육제도 짱짱맨)



1.
뭐, 이런 습성이 적어도 대학 다닐 때까진 크게 문제가 된 거 같지는 않다.
대부분 내 시간을 내 의지대로 자유롭게 조율하면서 사용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과제하다가 잘 모르는 부분이 있으면, '내가 아직 글을 쓸 준비가 되지 않았구나'라는 자기인식 하고 나서 추가자료를 되는 대로 긁어모아 읽어보고나서야 다시 과제로 돌아갈 수 있었다. 그 과정에서 소모되는 시간과 에너지는 온전히 내 스스로 감당하면 될 뿐이었다. 잠을 줄이든, 약간 무리해서 커피를 빨 든..(그래도 그 이튿날을 잠으로 채우든ㅋㅋ)

사회생활을 시작하고 나니, '준비'가 되지 않은 상태에서도 일단 행동으로 옮겨야 할 때가 많았다. 혼자하는 일이 아닌 엄연히 카운터파트가 있는 업무가 대부분이고, 그 무엇보다도 시간이 충분하지 않았다. 제한된 자원과 합리성 속에서 최적의 판단과 의사결정을 내려야만 했다. 입사 초기 무조건 정확한 데이터를 도출해 내기 위해서 납기를 희생했었다. 충분한 '준비'를 거쳐야 올바른 데이터가 나오고, 이것이 경영진의 올바른 의사결정으로 이끌 수 있다는 생각에서였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조금씩 생각이 바뀌기 시작했다. 데이터의 정확성과 납기 모두를 만족시킬 수 있다면 그 보다 좋을 수는 없겠지만, 어느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면 신속성에 쪼금 더 무게를 둬도 괜찮다는 생각이 들었다. 약간 부족한 데이터의 정확성은 리더가 가진 '다년 간의 경험'에서 나오는 '직감'과 '비슷한 선례에서 취했던 의사결정'의 교훈에서 메워질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도 가장 좋은 건, 속도와 정확성 모두 잡는 게 좋다.)


2.
조금 말랑한 부분에서도 그렇다.

소개팅 내지는 연애를 생각하면, 관성적으로 '내가 연애를 할 준비가 됐나?'를 생각하곤 한다. (사실상 조건반사)
이런 나를 보고 한 친구는 '도대체 그 준비가 뭐냐'며 농담 섞인 질책을 하기도 했다.

그러게.. 그 준비라는 게 뭘까?

'차'를 사야 하나?
'집'을 마련할 수 있어야 하나?
잘 생겨야 하나? [이건 준비한다고 되는 건 아니고]
아니면 '몸'이라도 좋아보이게 운동을 해야 하나?

그 친구 曰
'무조건 만난다고 다 결혼하는 것도 아니고, 함께 갖춰 나가면 되는거지, 준비만 하다가 시간 보낼수는 없지 않냐'고 했다.
그 친구 말마따나 '내가 준비해놨다고 그게 다 맞는 것도 아닐'텐데 말이다.



3.
그냥 되는 대로 살아도 괜찮지 않을까 싶다.

부산 셋째날, 이기대 수변공원으로 산책을 나갔다. 난 분명 '산책'을 목적으로 나갔다.
회사갈 때 신는 싸구려 운동화를 신고, 산행에는 어울리지 않는 청바지를 입고, 가방에는 마실 것 대신에 책을 채웠다.
누가봐도 '산행'을 위한 준비는 아니었다.


이기대 수변공원 산책로 동생말 입구에 내려 산책로를 따라 걸었다.
1~2km 남짓의 산책로인 줄 알았는데, 여울마당에 도착해서야 내가 4.7km 여정의 가운데에 있음을 알게 되었다.
그래도 뭐 어쩌겠나. 오륙도 공원까지 여정을 이어나갔다.

첫 발걸음을 뗄 때, 나는 4.7km나 되는 '산행'길에 맞는 준비를 제대로 못한 상황이었다.
설상가상, 전날 내린 비로 인해 생각보다 길이 많이 험했다. 청바지는 불편했고, 갈증은 심했다.
그렇지만 예상치 못한 '산행'은 무리없이 마쳤다.
산에서 불어와 바다로 향하는 바람을 온전히 몸으로 느낄 수 있었고, 드문 드문 낚시대를 드리운 신선들의 모습에 나 역시 잠깐 현생을 떠난 듯한 여유를 느낄 수 있었다.



4. 그러니까...
모든 것이 완벽하게 준비된 상황이란 있을 수 없다.
그러니, '준비가 되지 않았음'을 핑계 삼기 보다는, 그냥 한 번 해 봐도 괜찮을 거 같다.
그냥 한 번 해 봤는데 생각보다 할 만할 수도 있고,
생각보다 쉽지 않아도 어찌어찌 겪어보며 배우는 기회로 삼을 수도 있을테니 말이다.
함께하는 파트너가 있다면, 같이 만들어가는 재미도 있을거고..

어렵지만 그렇게 해보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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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unTang

생각이 많을 때는 정리하려고, 생각이 필요할 때는 찾아보려고, 가끔 끄적여 봅니다. 사는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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