뜨거운 답답함이 코 끝에 가득차던 시간이 지나고, 아침 저녁으로는 서늘한 기운마저 감돈다. 가을에 태어난 탓일까, 아니면 유독 가을과 관련된 추억이 많은 탓일까 뺨에 스치는 바람에서 느껴지는 시간의 원숙함을 그 누구보다도 빨리 알아채곤 한다. 시간의 흐름은 종종 나를 사유 속으로 끌어간다. 꿀맛같은 휴일을 30분 남긴 일요일 밤, 생각을 몇자 풀어보려 한다.
내가 되고 싶었던 나의 모습
머리가 커지고 대학에 오면서 고향을 벗어났다. 물리적으로 고향을 벗어나면서 동시에 나는 심리적인 고향에서도 벗어나고 싶었다. 19년을 살아온 고향, 그 곳에서 생활하면서 몸에 배어 있었던 엄격함과 소시민성, 갇힌 사고를 떨쳐내고 싶었다. 스무 살, 서울 살이를 시작하면서 작은 다짐을 했다. 지금부터는 조금 달라져 보겠노라고. 자유롭고 적극적인 사람. 그리고, 주위 사람들에게 어렵지 않은 사람이 되고 싶었다.
그래서 안하던 '짓'도 많이 해 봤다. 밤새 술을 마시며 놀아보기도 하고, 술을 마시고 수업에 들어가 보기도 했으며, 가끔은 수업을 제껴보기도 했다. 여러 경험을 해 보는 것이 좋다는 생각에 여러 동아리에서 활동도 해 보고, 단편 영화도 찍어봤다. 머리에 '왁스'라는 것도 발라보고, 아울렛에 가서 옷을 사보기도 했다. 친구들과 시시한 이야기를 나누며 허허실실 지내기도 하고, (지금은 끊은) 담배를 나눠 피우며 grape vine에도 참여해 봤다.
주관적 의미의 일탈을 경험하면서 나는 그렇게 조금씩 변하여 갔다. 자유로운 도시의 문화를 받아들이고 즐겼다. 그렇게 나는 19년 간 나를 에워싸던 철갑옷에 아주 효과적으로 균열을 내고 있었다. 당당함과 편안함을 가진 사람으로, 내가 되고 싶었던 내 모습으로 그렇게 잘 변화해 하고 있었다고 믿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꿀 수 없었던 천성
장면 하나. 2012년 11월 말. 진주 공군교육사령부 신병훈련소
6주 가까이 같이 지낸 훈련소 동기가 있었다. 종교참석도 같이 가고, 바로 옆에서 취침하면서 서로 수다도 떠는, 그런 친구였다. 그 친구가 나에게 한 마디를 던졌다. 형은 참 좋은 사람이고 많이 친해지고 싶은데, 아직도 조금 신비롭다고. 어떤 사람인지 잘 모르겠다고. 그 말 한 마디에 머리를 맞은 듯 했었다.
장면 둘. 2016년 8월 말. 동생과의 전화통화
무려 대학교 3학년인 동생이 걱정되어 전화를 걸었다. 부모님이 하지 못하는 잔소리를 내가 대신했다. 그러다가 동생에게 물어보았다. "너, 오빠가 어렵니?" 돌아온 대답은, "...응". 예상치 못한 대답에 한 동안 말을 잊지 못했다. 그 간, 네 살 터울의 동생에게도 먼저 연락하며 챙기고, 농담도 하고 고민도 들어주곤 했는데... 혹시나 나를 어려워 할까봐 부던히 친해지려 노력했던 그 동안의 노력이 무위로 돌아간 셈이니, 허탈함은 더했다.
장면 셋. 2016년 8월 말. 10년지기와의 카톡
오래 알고 지낸 친구에게 물어봤다. 내가 그리 어려운 사람인지. 또래에 비해서 다가가기 어려운 스타일이라는 솔직한 답을 내 놓는다.
또래에 비해 진중하고, 어른스럽다는 이야기를 들어오긴 했지만, 가장 가까운 사람들에게도 그런 이미지로 비친다는 것이 꽤나 충격이었다. 19년 간 입어왔던 철갑옷을 이제 좀 벗어던지나 했는데, 나도 모르는 사이에 그 철갑옷은 오히려 더 단단해져 있었다. 가장 가까운 사람들 마저도 부담스러워할 정도로. 그 동안 사람들을 만나는 것이 왜 어려웠는지 대강 퍼즐이 맞춰졌다. 나이에 맞지 않는 철갑옷을 입고는 아저씨들이 할 것만 같은 이야기, 문체, 어투, 레토릭을 사용하니 그 어느 누가 쉽게 다가올 수 있을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너는 좋은 사람이야. 그런데 그게 가려져 있어'라는 10년지기 친구의 응원이 마음에 와 닿았다. 친구는 내게 조금 더 '인간적인' 모습을 보이라는 충고를 해 줬다. 조금은 허술한 모습을 보여주어 주변 사람들이 들어올 여유를 주라는 의미다. 맞다. 그게 내가 되고 싶었던 나의 모습이다. 음.. 변해야하지.. 변해야지.. 어려운 숙제를 하나 얻었다.
이걸 해결하지 못하면 나는 고독사할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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